정류장 근처의 으슥한 모텔촌 사이, 파란 지붕 술집의 앞뜰이 이 동네의 유일한 흡연구역이다. 시린 손을 비비며 발을 밀어 넣으면 항상 사장인지 기둥서방인지 모를 아저씨가 어슬렁대는 게 보였다. 일전에 이어폰을 끼고 모른 체 했다 크게 혼났던 적이 있던 터라, 모텔촌 초입부터 노래를 끄고 두리번대며 아저씨에게로 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빵순이, 오늘은 빵...
테이블에 올려둔 해바라기가 시들시들했다. 케이크를 먹다 말고 영재에게 연락해 일요일에 시간이 되느냐고 물었다. 맞은 편 자리에 올려둔 케이크의 크림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른 새벽 서오릉에서 만나자는 답장이 왔다. 가게에 연락해 모종 열 개와 다발 두 개를 언제나와 같은 디자인으로 준비해달라고 했다. 남은 커피를 모조리 비워내고 케이크를 치웠다. “걔가 그...
푸른 잎을 자랑하며 2미터에 다다를 때까지 컸었다고 자랑스러워 할 지언정 결국 잎은 누리끼리하게 변하는 것이었다 나도 젊었을 땐 말이야…… 숨을 거두셨습니다. 수의를 준비해주세요 노랗게 떠버린 잎과 줄기를 잘게 다져버릴 때 타바코는 악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타바코의 말라 쪼개진 몸뚱아리는 여러 개의 종이에 싸여 곧게 뻗어졌다 입관하겠습니다 *담배는 저온...
[ BGM : 염신혜, 선우정아 - For him ] 벌써. 겨울방학이다. 담임은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다른 학교에 배치된다고 했다. 그 사건은 딱 일주일 뒤 대부분에게서 잊혀졌다. 그 나물에 그 밥. 혼자서 중얼대면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아버지는 그대로다. 지민의 부모가 찾아왔던 날이 동네 사람들에게서 점점 잊히기 시작하면서부터 다시 일상의 반복으로 ...
[ BGM : blur - No distance left to run ] 수국 꽃다발. 순간에 사라지는 노을을 닮은 연보랏빛 수국을 갖고 싶다고 했었다. “모든 꽃에는 꽃말이 있어.” 옥상을 스치는 가을바람을 한껏 안아내며 그렇게 말했었다. “평범한 꽃다발로는 성에 안 차는 부분이 있잖아. 형식적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게 좋은가봐. 아직은 찾기 힘들겠지만,...
지민과의 약속을 위해 아르바이트 시간을 조정해야 했다. 점장님은 이번에도 흔쾌히 허락했다. 구멍이 난 내 자리에 오전조 직원을 대타로 넣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대신 돌아오는 토요일은 오전부터 풀타임 근무를 하기로 했다. 점장님은, 쉬는 김에 푹 쉬고 나중에 더 열심히 하라며, 오전 근무를 자처하는 나를 막아섰다. 이 이상 민폐 끼치고 싶지는 않아요. 괜찮다...
[ BGM : Kings of Convenience - 24-25 ]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더위가 물러가고 시원한 바람이 찾아왔다. 땀으로 범벅되어 잠옷이 몽땅 젖은 채 찝찝함에 눈을 떴던 아침 대신, 나름, 상쾌하게 하루를 맞이했다. 운동장을 뒤덮고 있던 녹음이 대지를 감싸는 태양에 누렇게, 뻘겋게 떠갔다. 이파리 사이로 반사되는 빛이 눈부셔 이마에 힘을...
[ BGM : Birdy - Skinny love ] 뭐해? 바쁜가보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문자 확인하면 답장 해줘. 답이 오지 않는 문자만 몇 통 째인지 모르겠다. 방학식 날,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이후로 지민은 답장도 하지 않았다. 그 날 제대로 물어볼걸. 어딘지 도망치는 것 같았다고 느꼈을 때,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던 것은 아무래도 착각이 ...
한 번 터뜨린 감정은 쉬이 갈무리되지 않았다. 서로의 팔을 붙들고, 그 모습 그대로 한참을 울기만 했다. 우리의 오른팔 소매는 이미 축축했다. 눈물을 흡수할 공간도 남지 않았다. 두 개의 얼굴은 하염없이 젖어들어갔다. 무어라 할 말도 없었다. 위로나 공감의 말이 아니어도, 우린 같은 사람들이야, 그런 생각이면 충분했다. 짙어지던 노을은 시간을 멈춘 듯 우리...
[ BGM : Red Hot Chili Peppers - Porcelain ] 등교를 관둔 지 정확히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잘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벌써 6월에 돌입한 지 한참이 지나버렸음은 몇 걸음 걷지 않아도 땀을 흐르게 하는 날씨로 알 수 있었다. 왼팔을 보여달라는 지민의 문자에 답장은 하지 않았다. 등교하는 척 밖을 나돌아다닐 기운도 없었다. 숨...
꽤 훌륭한데? 지민은 빨갛게 물든 교재가 어지간히 흡족스러웠나보다. 제대로 된 여름은 오지도 않았는데 교재의 앞부분에서는 장마가 내렸다. 빗줄기는 점점 약해지더니, 뒷부분은 스콜 정도의 빗금만이 그려져 있었다. 지민이 동글동글 눈이 내리는 자신의 것과는 대비되는 내 교재를 보고 싱글벙글 웃었다. “아직 갈 길이 먼데, 뭐.” 같이 공부를 하자고 제안했던 지...
지민을 만난 뒤부터, 정확하게는 다들 새 친구를 사귀고 자신의 무리를 확정지을 즈음부터 날짜를 계산하는 일이 줄었다. 구태여 결석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늘어났기에 그랬다. ‘친구’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지민은 음악실을 자주 찾아달라고 했지만 나에게도 조금의 염치라는 것이 있었다. 이미 수업 중에는 지민의 연습실을 집처럼 드나드는데, ...
au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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